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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감옥에서 존재의 기쁨으로
Author
Joonwoo Lee
Date
2026-08-13 05:05
Views
62
마태복음 6: 31-33절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나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1절) 더 많이 ‘가지려고’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 이 끊임없는 갈망을 우리는 ‘소유’ 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반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33절) 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한 나의 모습인 ‘존재’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 라는 소유와 존재에 대한 인류의 고민을 예리하게 짚어낸 책이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 (Erich Fromm)의 <소유냐 존재냐>입니다. 이 책이 출간된 1970년대는 고도의 산업화로 경제가 급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은 기술이 발달하고 돈이 많아지면 당연히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으로 정의된다(I am what I have)." 내가 가진 재산, 나의 사회적 지위, 입고 있는 명품, 심지어 내 자녀의 성공으로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삶은 필연적으로 염려와 불안을 낳습니다. '내가 가진 것'은 언젠가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를 잃는 순간 나라는 존재도 사라진다고 믿기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 쌓아두려 하고 그럴수록 더욱 불안해집니다. 성경은 이런 모습을 가리켜 ‘염려하는 사람들’ 이라고 부릅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로 자신을 정의하지 말고, 존재 자체로 증명하라고 권면합니다. "나는 존재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I am as I am)."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와 관계 맺고 어떤 성품으로 살아 가느냐에 가치를 두는 삶입니다.
그는 책에서 두 시인의 태도를 비교합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은 길가에 핀 꽃이 너무 예뻐서 "뿌리째 뽑았습니다." 그리고 손에 쥐고 탐구하려 하지만, 결국 꽃은 죽고 맙니다. 소유하려는 욕망이 생명을 파괴한 것입니다. 반면 바쇼는 길가에 핀 냉이 꽃을 그저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꽃도 살고, 사람도 행복합니다. 존재 자체를 즐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이라는 꽃은 억지로 꺾어서 내 주머니에 넣어 소유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계획과 욕망대로 내일을 통제하고 소유하려 들면, 오늘과 내일의 기쁨은 모두 시들어 죽고 맙니다. 내일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시간 그 존재 그대로를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오늘도 살고, 내일도 살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도를 ‘소유를 늘리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 더 갖게 해주세요. 남들처럼 더 좋은 것을 소유하게 해주세요." 하지만 행복은 욕망을 소유하고 채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채울수록 더 목마른 욕망의 속성상, 소유를 통한 행복은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은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소유의 감옥에서 걸어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소유한 물건의 크기로 평가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 작품이라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이미 헤아릴 수 없이 고귀함을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 소유를 향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 자녀로서 존재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 라는 소유와 존재에 대한 인류의 고민을 예리하게 짚어낸 책이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 (Erich Fromm)의 <소유냐 존재냐>입니다. 이 책이 출간된 1970년대는 고도의 산업화로 경제가 급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은 기술이 발달하고 돈이 많아지면 당연히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으로 정의된다(I am what I have)." 내가 가진 재산, 나의 사회적 지위, 입고 있는 명품, 심지어 내 자녀의 성공으로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삶은 필연적으로 염려와 불안을 낳습니다. '내가 가진 것'은 언젠가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를 잃는 순간 나라는 존재도 사라진다고 믿기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 쌓아두려 하고 그럴수록 더욱 불안해집니다. 성경은 이런 모습을 가리켜 ‘염려하는 사람들’ 이라고 부릅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로 자신을 정의하지 말고, 존재 자체로 증명하라고 권면합니다. "나는 존재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I am as I am)."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와 관계 맺고 어떤 성품으로 살아 가느냐에 가치를 두는 삶입니다.
그는 책에서 두 시인의 태도를 비교합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은 길가에 핀 꽃이 너무 예뻐서 "뿌리째 뽑았습니다." 그리고 손에 쥐고 탐구하려 하지만, 결국 꽃은 죽고 맙니다. 소유하려는 욕망이 생명을 파괴한 것입니다. 반면 바쇼는 길가에 핀 냉이 꽃을 그저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꽃도 살고, 사람도 행복합니다. 존재 자체를 즐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이라는 꽃은 억지로 꺾어서 내 주머니에 넣어 소유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계획과 욕망대로 내일을 통제하고 소유하려 들면, 오늘과 내일의 기쁨은 모두 시들어 죽고 맙니다. 내일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시간 그 존재 그대로를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오늘도 살고, 내일도 살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도를 ‘소유를 늘리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 더 갖게 해주세요. 남들처럼 더 좋은 것을 소유하게 해주세요." 하지만 행복은 욕망을 소유하고 채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채울수록 더 목마른 욕망의 속성상, 소유를 통한 행복은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은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소유의 감옥에서 걸어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소유한 물건의 크기로 평가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 작품이라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이미 헤아릴 수 없이 고귀함을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 소유를 향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 자녀로서 존재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